정치와 사회

부처님 오신 날 - 자비는 증오를 넘어설 수 있을까?

레기통쓰 2023. 5. 27. 02:22

작금의 시대를 뭐라 정의하면 좋을까? 나는 증오의 시대라고 본다. 한 번 싫어하는 사람은 다시는 안봐도 될 거 처럼 욕하는 시대. 그냥 맘에 안들면 다 증오하고 미워하는 시대. (현실에서야 착한 얼굴들을 하고 있지만 웹상에서는) 익명성 뒤에 숨어서 증오를 쉬지 않고 쏟아내는 시대. 나랑 (생각이) 다른 모든 것을 증오하고 배척하는 그런 시대라고 본다. 그래서 단어2개로 요약하면 증오의 시대가 되는 것이다. 이런 증오의 시대에 과연 부처님의 가르침은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증오란 무엇일까? 증오란 어떤 대상이나 사실, 상황등을 극도로 미워하고 싫어하는 감정을 말하며 혐오와는 차이가 있다. 혐오와의 차이는 혐오는 피하고 싶은 마음이 기반이 되는 소극적인 미움이라면 증오는 적극적으로 공격하여 존재를 없애버리고 싶은 적극적인 미움이다. 차이가 있다고 썼지만 실제로는 혐오와 증오는 공존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세월호 유족들의 천막 앞에서 폭식놀이를 했던 일베회원들을 생각해보자(일단 나는 그 인간들이 밉다). 미워하는 마음은 한결같지만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마음까지 포함된 증오와 혹시 저 자식이 나한테 와서 이상한 소리하며 나를 조롱할까 싶어 피하고 싶은 마음까지 포함된 혐오가 공존할 것이다. 

 

증오는 이유가 없는 경우가 많다. 증오들의 많은 유형이 '그냥 미워서'이다. 나는 경상도 출신인데 동네 어른들이 이유없이 전라도에 대해 욕하는 소리를 어릴 때부터 들었다. '전라도 사람들은 사기를 잘 친다', '전라도 사람들은 나중에 꼭 뒤통수 친다(배신한다)' 등등의 이유없는 말을 자주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경상도는 사기꾼 없나', '경상도 애들도 배신 잘 때리더라' 등등으로 어릴 때 들었던 말들을 지워나가기 시작했는데 동네 친구 중 몇몇은 아직도 그러고 있다. 전라도라는 단어만 나오면 증오하듯이 욕을 해대는데 실제로 전라도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거나 사기를 당한 사실은 없다. 들었다는 이야기도 자기가 직접 들었다는 것도 아니고 건너건너의 누군가가 당했다더라 정도의 이야기 이다. 이건 증오가 교육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교육이나 다른 사소한 이유로 자기도 모르는 새 어떤 것을 중오하는 경우가 많다. 

증오는 사랑과 반대되는 개념이지만 완전 관계가 없지는 않다. 연예인이나 유명인들의 안티팬 중에서 가장 무서운 안티팬은 원래 극성팬이었다가 안티로 돌아선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팬이던 시절에 대상인에 대한 모든 정보를 모아두어서 안티로 돌아서면 공격이 예사롭지가 않다고 한다. 이런 안티들이 사랑이 증오로 바뀐 대표적인 유형이다. 사랑이 증오로 바뀌는 계기는 사소한 일부터 큰 일까지 다양하다. 계기가 사소한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실제로는 증오와 사랑이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언제나 붙어있는 개념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그렇다면 증오가 사랑으로 변한 경우도 있을까? 있기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잘 없을 것 같다. 아래 단락에서 언급했듯 증오는 점점 커진다는 게 그 이유일 것이다)

 

증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점점 커진다는 것이다. 이 점은 분노와의 차이이다. 분노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점점 없어지는데(뉴스에서 나쁜 일을 보도하면 다들 분노하지만 곧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 증오는 어떤 계기가 있지 않으면 점점 강해진다. 미워하는 마음이 미워하는 이유를 찾게 하고 그 이유가 미워하는 마음을 더 불러내는 것 같다. 이 증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끝없이 커지기 때문에 이 미움을 해결하기 위해 (일부 사람은) 극단적인 방법(살인 등)까지도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안티팬은 대상을 증오하기 때문에 안티는 점점 더 극단적이 될 수 있다. 처음에는 욕 정도만 쓰던 사람들이 면도칼을 보내거나 음료에 독을 타서 보내기까지 하는 것이다. 

 

증오는 지배층이나 사회, 종교가 이용하기도 한다. '악에 대한 증오'는 정당하다는 개념이다.  맹자의 '수오지심羞惡之心'(羞는 부끄러워할 수, 惡은 악마할 때의 악 자 이지만 여기서는 미워할 오 이다. 之는 '~의' 지 이고 심자는 마음 심이다. 자기의 옳지못함을 부끄러워하고(羞), 남의 옳지못함을 미워(惡) 하는(之) 마음(心)이다)이나 성서 시편의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모든 죄를 미워하시고, 모든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죄인에게 분노하신다'라는 구절들이 대표적이다. 죄를 짓지마라는 말을 하나님이 미워하신다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미워하는 것이 정당한 경우를 드는 것이다. 이런 것이 잘못 적용되면 증오를 더 키우게 된다. 예를 들어보면 민주당 지지자들은 국힘당 지지자들을 2찍이라 부르며 무시하고 조롱하고 증오하는데 그 이면에는 우리(민주당 또는 그 지지자들)가 정의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정의니까 불의인 너희들을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는 논리이다. 이런 논리가 극단적으로 발전해버리면 우리쪽 정치인들은 잘못이 없고 모든게 오해이고 잘못이 없는 것으로 밝혀지는 상대편 정치인은 언론과 검찰이 죄를 덮어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인식하면 어떤 사건이 벌어지던(이쪽이 잘못하거나 저쪽이 잘못하거나) 상대쪽은 점점 더 미워지게 되는 것이다. 증오가 커지는 것이다. 

 

이런 증오를 데카르트는 사회 또는 집단에서 '이성'을 통해 제거되어야 할 존재로 보았으며 스피노자는 고통의 일종으로 보았다. 프로이트의 설명이 가장 뭔가 있어보이는데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적인 측면에서 '증오는 어떤 불행 혹은 불편한 감정을 없애기 위한 자아 의식의 발현'이라고 하였다. 이런 말들이 잘 이해는 가지 않지만 대카르트의 해석을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일단 나 편하자고 드는 감정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증오는 더욱더 큰 증오만을 부르지 증오한다고 마음이 편안해지지는 않는다. 

 

부처님은 '원한은 원한으로 (갚는다고) 풀어지지 않으리니 원한을 버릴 때에만 풀리리라. (법구경 1장)' 라고 말씀하셨다. 원한을 증오로 읽으면 앞에서 말했던 말과 같은 말이 될 것이다. 증오는 증오만을 부르지 마음을 편하게 할 수 없다. 원한을 버릴 때만 풀린다는 것은 증오가 아니라 다른 방법이 내 마음을 편하게 해줄 거라는 말이다. 이 다른 방법이라는 것이 자비이다. 불교에서는 자비는 무한이며 증오(憎惡)나 원한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자비란 무엇인까? 자비는 자(慈)와 비(悲) 두 낱말의 합성어이다. 자(慈)는 애념(愛念: 사랑)으로 중생(남들)에게 낙(樂; 즐거움)을 주는 것이고 비(悲)는 민념(愍念: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중생)의 고(苦: 괴로움)를 없애주는 사랑이다. 사랑과 연민이 포함된 말로 이기적인 탐욕을 벗어나 넓은 마음으로 질투심과 분노의 마음을 극복할 때에만 발휘될 수 있다고 한다. 정의는 이렇지만 실제로는 비(悲)가 더 강조된다. 달라이 라마 14세가 '자비는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을 이해하고자 도와주는 마음이다. (다른 사람이 행복해지길 바란다면, 자신이 행복해지길 바란다면 자비를 행하라)' 라고 말한 것이 이런 자비의 역할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자비는 무아(無我) 사상을 바탕으로 즐거움을 주고 고통을 제거해주는 지극한 사랑이다(이 표현은 자비(慈悲)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복사해왔다). 무아사상이라는 것은 '진짜 나(我)는 없는(無) 것'을 말한다. 자비의 근간이 되는 무아사상의 무아(無我)는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줄임말이다. 윤회설을 믿는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실체를 가지지 않는 것이 무아(無我)라고 가르친다. 부처님은 절대적 자아(부처님의 시대에 인도의 사상은 아트만이라고 하는 절대적 자이가 있다고 가르쳤다. 이것이 인도 카스트의 근간이고 신분차별의 근거가 되었다)라는 개념이 고통을 가져다 준다고 보았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자신과 자신이 가진 것이 영원할 거라 믿고 그 사실에 집착하기 때문에 고통이 생긴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존재는 없으며 이런 사실에 대해 아는 것을 통해 집착에서 벗어나서 마음의 평화를 얻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자비가 증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다 라는 가르침을 주신다. 

 

이런 자비가 지금 시대의 증오를 없앨 수 있을까? 일단 나는 완전히 없애지는 못할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어느 정도 증오를 줄여줄 수는 있을 것 같다. 자비는 상대방이 겪는 고통을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한다고 앞에서 말했었다. 어떻게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라는 것은 지금 세상이 그렇지 않아서 괴롭다는 고통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상대의 주장이 나오게 된 배경을 이해해봐야 한다.  상대에 대해 알아야 그가 주장하는 것이 어떤 배경에서 나왔는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자비를 지금 시대에 맞게 바꾸어서 '자비는 상대방의 생각(과 그 생각이 나온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그 시작이다'라고 규정지으려고 한다. 이런 이해과정을 거쳐야만 상대의 주장이 '틀린 주장'이 아니라 '나와는 다른 주장'이라는 걸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상대를 알아가는 과정 전체를 자비로 볼 수도 있겠다. 상대를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생각과 그 생각이 들기까지의 배경을 이해함으로써 상대를 이해하고 그를 통해 상대에 대한 증오를 좀 줄여보자고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이렇게 말은 하고 이론은 빠싹하지만 실제로 실행은 잘 안된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노무현 전대통령의 대통령 후보시절부터 민주당계열을 지지해온 내게는 그동안 국민의힘(과거에는 다른 이름들이었지만)이 발표한 모든 정책은 다 헛소리였다. 어떤 생각(이유)로 저 정책이 나왔을까 하는 이해 자체를 거부하고 국민의힘의 의원이면 악의 화신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이게 최근 몇 년동안 조금씩 바뀌기 시작하였다. 지인중에 국민의힘 지지자들이 몇 분 있다. 이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하다보니 조금씩 왜 그런지 이해가 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위안부 문제같은 걸 들 수 있다. 이미 80년 가까이 지나가는 과거를 들추는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는 질문에 내가 그 분들의 한은 어떻게 하느냐라고 물어보니 그건 잘 사는 우리나라 정부가 보상해주는 게 낫지 않겠나 였다. 아래(사족2)에서도 언급 다시 하겠지만 일종의 전체주의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개개인의 피해는 살짝 덮고 일본과 (겉으로라도) 친하게 지내는 것이 우리나라에 이익이 되지 않겠나 라는 대답을 듣고 그제서야 '아 그렇구나'라고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냥 나랑은 생각이 다른 것이다. 내가 중요시하는 개개인의 행복이라는 가치가 저 쪽에서는 뒤로 밀리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저 쪽의 주장들이 일견 이해되기 시작하였다(하지만 국민의힘 사람이 '서민을 위한다'는 걸 내세우면 그건 아직도 헛소리 라고 생각한다. 서민의 표 이외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ㅎㅎ). 생각이 다르다는 걸 알고나서는 그렇게까지 밉지는 않았다. 그들을 다 이해하지도 못하고 완전히 안 미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예전처럼 '잡아 죽이고 싶다' 정도의 맹렬한 증오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내 경험이 증오를 줄이는 방법에 대한 하나의 힌트라고 생각한다. 정확하게 어떻게 하면 증오가 사라진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이면 상호간의 이유없는 비난 역시 줄어들 것이고 그렇게 서로를 이해해보려 할 때 증오가 약간은 옅어질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게 옅어지다 보면 증오가 그냥 더 이상 커지지 않는 일반적인 미움 정도까지 되지 않을까라고 상상해본다. 나는 이런 이해(와 이해하려는 노력)가 지금 세상에 필요한 자비의 한 형태라고 생각한다. 이런 자비를 통해서 사회의 증오가 조금이라도 줄어든다면, 그래서 사회의 에너지가 이상하게 소모되지 않는 건강한 사회가 된다면 그것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 덕분일 것이다. 

 

 

사족1) 내가 잘 모르는 것들 이거저거 찾아보고 읽어본 거 정리하고 설명해 봄

 

글을 시작할 때 쓴 '작금의 시대'의 '작금昨今'이란 어제 작 과 오늘 금이 합쳐진 말이다. 그대로 해석하면 어제와 오늘이지만 실제로는 요즘, 요즈음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몇 일 전 미스터 선샤인을 봐서 그런지 갑자기 작금의 시대 라는 말이 떠올라서 처음 시작을 작금의 시대 라는 말로 해봤다. 극중의 김태리의 대사가 '작금의 시대를 낭만의 시대라 하더이다'라는 말이 있다.

 

낭만浪漫은 romance을 일본인이 한자로 음차한 것이다(중국식 발음보다는 일본식 발음 ろうまん(로우망)에 가깝다. 일본에서는 낭만浪漫이라는 한자를 로망이라 읽는다. 즉 '남자의 로망이지' 같은 표현은 일본식 표현이다. 차라리 '남자의 낭만이지'라고 말하는 게 맞다). Romance는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또는 그런 분위기를 말한다. '로맨틱하다'의 그거랑 같은 말이다. 김태리의 대사에서 낭만의 시대라는 말은 romance라기 보다는 (계몽주의에 반대해서 생겨난) 낭만주의의 시대라고 해석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계몽주의란 이성을 통해 사회의 무지를 타파하고 현실을 개혁하자는 일종의 사상 운동이다(나무위키).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안가면 뉴턴과 칸트 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사람으로는 사실 사회계약설을 말한 장 자크 루소가 더 어울리지만). 다시 말해 과학과 이성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바꾸어가려는 사상이다. 근거없이 하늘이 둥글다 땅이 네모모양이다 이런 말을 하던 시대와 분리해서 과학적인 근거만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려고 한다. 그래서 사회성, 도덕성 같은 개념들도 역시 과학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계몽주의자들은 이성과 과학을 통해 사회는 언제나 진보하는 쪽으로 발전한다고 한다. (이런 역사의 진보를 부정한 대표적인 학자가 칼 마르크스이다. 언제나 진보하는 게 아니라는 게 그 주장의 핵심이다) 이런 계몽주의가 극단으로 흐르면 엘리트주의, 전체주의가 된다. 

 

엘리트주의는 사회를 일부의 엘리트가 이끌어나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전체주의는 민족이나 국가가 개인보다 더 중요하다는 내용이다. 계몽주의는 사회가 계속 발전을 한다는 주장을 하는데 이것이 극단적으로 발전하면 '사회의 발전이 가장 중요하다'라는 주장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사회가 발전하려면 어중이 떠중이로는 안되고 똘똘한 일부의 사람들(엘리트)이 사회전체를 이끌어나가야 한다는 엘리트주의 논리가 유도되는 것이다. 또한 사회의 발전을 최우선의 명제로 두니까 개인의 희생따위는 사회의 발전이라는 대명제 앞에 무시되게 되는데 이것이 전체주의이다.

 

사족2)

강제징용피해자 문제나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한국인들이 있다. 위안부 관련 집회나 강제징용피해자 모임 앞에 일장기를 흔드는 사람들이다. '내 딸이 위안부로 끌려갔어도 나는 용서한다'라는 망언을 남긴 주옥순 같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이 가진 생각이 '전체주의'이다. 일본과 친하게 지내서 나라가 발전하는 것이 좋지 왜 몇십년 전의 이야기를 꺼내서 서로간의 화기(애애)를 해치는가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랑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머리 속으로는 이해할 수는 있지만 감정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지금 대통령이나 정부가 취하는 태도도 이와 같다. 선거 때는 표가 급하니 내가 다 해결하겠다고 했지만 대통령이 되고 나니 전체주의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공약을 파기한다는 것에 대해 신경이 안쓰이지는 않지만 국가 전체를 위해서 자신이 남들이 하지 못한 결단을 내린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 같다. 이 사람들은 징용피해자들이 어떤 돈이든 받고 조용히 있어주면 일본과 친하게 지내서 우리나라가 발전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괜히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빨리 돈을 주려는 것이다. 사과 같은 거 보다는 돈이 중요하다는 생각 역시 나와는 다른 생각이지만 그들의 가치관이니까... 그것이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나랑 생각이 너무 달라서 이런 차이를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윤석열 정부를 지지할 수가 없다.